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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소결 세라믹 역사

by 포터리글레이즈 2020.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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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우리나라의 소결 세라믹 역사

 

우리나라는 1970년대에 공업의 발전으로 산업용 세라믹이 생산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공업용 도자기의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소결 세라믹은 유사 이전부터 시작된 오랜 역사를 가집니다. 석기 시대에 들어와 토기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토기는 무늬에 따라서 덧무늬 토기와 빗살무늬 토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특히 덧무늬 토기가 일부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에 비하면 빗살무늬 토기는 한반도의 전역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그만큼 발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낙랑 시대 때 유물에서 푸른 유약을 바른 토기가 발견되었을 정도로 고대 이전부터 도자기의 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 시대때는 토기가 생활화되었습니다. 고구려는 흑회색의 연질 토기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중국 토기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통일 신라는 기술, 예술성면에서 이전보다 뛰어난 형태로 토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토기나 기와 등에서 볼 수 있는 문양들은 당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아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모습을 보입니다. 납이 들어간 녹색 유약을 입혀 도자기의 형태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고려 초기까지만 하여도 신라 토기나 녹색 도자기가 서민용 그릇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비취색 고려청자가 전성기를 이루게 된 때는 문종에서 의종까지입니다. 의종 때는 상감 기술이 발달하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상감청자가 만들어졌습니다. 1230년까지 고려의 자기가 전성기를 이루었고 그 후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다소 투박해지면서 유약도 광택을 잃게됩니다. 

 

조선 시대 자기는 고려자기와 비교했을 때 평민적이면서 실용적이고, 소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청자에서 백자로 바뀌는 과도기로 볼 수 있으며, 회황색과 회청색의 분청사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려 청자와 조선의 백자로 많이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고려 시대때에 이미  백자가 만들어졌었습니다. 많지는 않아도 갈색 자기도 있었습니다. 다만, 조선 시대에 들어서 백자가 발달했고, 청자는 반대로 쇠퇴했습니다. 그리고 식기 항아리용 백자호처럼 보다 실용성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조선 시대 영조부터 고종까지 유약은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청색 혹은 회색의 빛을 띠고 있었으며 코발트염을 사용했습니다. 이후 관요의 하나였던 분원이 민요로 바뀌면서 우리 나라 도자기 전통이 끊어졌습니다.  광복 후 공장이 9개 정도 존속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지고 부산 영도에 있던 '대한 도기'만이 터널 가마 1기를 보유하고 있다고합니다. 그 후 국내 수요가 증가하여 1950년 6.25전쟁까지 68개에 이르는 여러 공장들이 가동됩니다.

 

전쟁 후 1955년에  그동안 수입해왔던 타일류 국산화에 성공하였습니다. 1957년에는 위생 도기 공장들이 건설되어 보다 도자기의 품목이 다양해졌습니다. 그리고 후반부터는 생활 자기에서 벗어나 건축용, 공업용들이 생겨났습니다. 1972년 말부터는 타일류를 포함하여 식기류나 노벨티 등 수출도 크게 증가하게됩니다. 1년 후 무려 1000만 달러를 넘기며 1980년에는 실적이 1억 달러가 됩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0대 수출 전략 산업으로 도자기 공업을 지정하였습니다. 이후 품질의 고급화에 집중하고 기술 개발에 더 집중했습니다. 1981년 특수 고압 애자와 위생도기도 수출을 하게됩니다. 이 때부터 본차이나 제품도 생산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계속적인 발전을 이루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며 반도체와 통신산업의 발전으로 재료 공학에서의 소결 세라믹도 일시적이나마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하지만 재료 공학부분은 어떠한 발전이 있더라도 중요한 부분으로, 앞으로도 발전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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